가족, 유괴, 살인, 강간, 오컬트...
글쎄, 가장 우리와 가까우면서도 이질적인 소재들의 나열이 아닐까 싶다.
위 표제어들은 사토 유야의 소설 플리커스타일이 내건 표제어이기도 하다.
메피스토 상 수상작이라는 관을 뒤집어쓰고 국내 독자들에게도 소개된 플리커스타일
나 역시 주위 지인의 극찬으로 구입까지 하게 된 책이었는데,
기대보다는 상당히 함량 미달의 소설이었다
플리커스타일을 보는 동안 느낀 감상은,
잘 짜여진 비주얼 노벨을 플레이한다는 느낌, 이었다.
책이라는 인쇄 매체를 통한 미디어임에도 읽는 동안의 감상은 게임을 플레이한다는 말인데,
이것이 과연 좋은 현상인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겠다.
적어도 나에게는 마이너스 요소였지만.
가만 생각해보면 이런 느낌을 받게 된 요인에는 문체가 가장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우리 나라에서도 최근에는 많이 볼 수 있는 형태이지만, 특히 일본쪽의 라이트 노벨에서 많이 볼 수 있는 문체로, 특징은 '이미지의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주위 상황이나 분위기, 인물의 심리(이쪽은 보기 힘들지만) 등을 직접적인 묘사보다는 마치,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시각적 이미지의 묘사로 나타내는 쪽이다.
흔히 접할 수 있는 대표적인 예는, 월희, 페이트로 유명한 나스 키노코의 문체랄까
이런 글은 의외로 호불호가 확실히 갈리는 편이다
나 역시 이러한 스타일의 글을 그다지 즐겨하지는 않지만, 확실히 쉽게 읽혀진다는 점과 몰입이 쉽다는 점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겠지
사토 유야의 글 역시 '서술어의 사용을 줄인 이미지의 묘사'를 적절히 사용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처음 책을 잡고 읽는데에 대한 거부감은 그다지 없다.
특히 나같은 만화나 애니메이션을 많이 보고 자란 층에게는 더욱 그럴 것이고.
하지만 가장 중요한 내용은 어떨까
책을 읽으면서 어디선가 많이 본 듯한, 기시감을 느낀 사람이 나만은 아닐 거라 본다.
1980년생이라는 사토 유야의 프로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사토 유야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미디어 문화의 황금기였던 1990년대 후반기를 마음껏 향유하고 자란 세대이다.
그래서인지 '플리커 스타일'은 많은 작품들의 오마쥬 격 성향을 띠고 있다
('스페어'라는 개념, 전화를 통한 인격의 변화 등등)
이러한 점 덕분에 결말을 조금 예상할 수도 있었다.
소설의 구성 또한 그렇게 만족스러운 점수를 주기는 어려웠다.
온갖 자극적인 소재는 다 끌어들였지만, 주인공인 카가미 키미히코(家)의 광기를 표현했다기는 조금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그 광기라는 게 광기의 절규라기보다 그냥 단순히 미친놈으로만 비쳤는데,
그건 오컬트라는 판타지적 요소의 색이 너무 짙었기 때문이 아닐까.
카가미 키미히코는 현실과 비현실 사이에서 결국 비현실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평범과는 동떨어져 있는 카가미 가의 일원들 역시 한몫했지만
결국 '플리커 스타일'은 혹자의 평대로 신본격 미스터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고, 그저 단순히 조금 더 미스터리 적인 라이트 노벨이라는 게 내가 느낀 그대로이다.(사실이 그렇기도 하고)
이번에는 카가미가 연작 소설의 두번째인 에나멜을 바른 혼의 비중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자
이 이야기는 플리커 스타일에도 등장한 키미히코의 누나인 료코의 학창시절에 벌어진 이야기이다.
나보다 먼저 이 책을 읽은 모 양은 전작인 플리커 스타일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다는 평이었는데,
왜일까, 난 오히려 에나멜을 바른 혼의 비중에 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플리커 스타일에 조금 실망을 한 전적도 있긴 했지만, 일단 구성면에서는 좋은 점수를 주고 싶다.
일단 내용은 차치하더라도 각각의 인물이 겪게 되는 사건이 일련의 흐름 속에 있고, 이것을 각각의 시점에서, 요일별로 나누어 전개하는 점은 레이아웃 측면으로는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소설이라는 형태의 완성에 있어서는 조금 더 나아진 모습이랄까
내용쪽에서 에나멜에서는 전작에 한술 더떠 카니발리즘까지 가져왔다.
책의 띠지에서 '카니발리즘'이라는 문구를 봤을 때는 정말이지. '하이고...'라는 말이 절로 나왔지만 정작 이야기를 읽는 동안은 그렇게 인식이 되지 않은 게 사실이다.
작품 상에서 이 식인이라는 설정은 그 자체가 주가 아닌 부수적인 요소였고, 작가인 사토 유야역시 사나에가 식인을 하는 모습보다는 그 결과에 좀 더 포커스를 맞춰 묘사를 한 듯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
아니면 이 식인이라는 설정이 나에게는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말이라 실감이 오지 않았기 때문일수도.(오히려 이 장면보다는 치즈루가 학대를 당하는 장면이 더욱 몰입이 되었으니)
잡은 자리에서 그대로 끝까지 읽어내렸을만큼 몰입도는 강한 책이었지만, 아쉬웠던 점이라면 플리커 스타일에 비해 너무나도 불친절한 끝맺음이랄까.(사실 플리커 스타일은 끝이 좀 보이긴 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정상적인 인물이 하나도 없다는 점.(그래도 전작에서는 아스미라는 쉬어가는 코너가 있었건만)
또한 연작소설인만큼 플리커 스타일에서 불분명하게 넘어갔던 부분이 에나멜에서 조금이나마 추측의 여지를 남겨준다던가, 료코의 행동원리에 대한 파악이 가능한 부분을 찾는 재미도 좀 있다.
플리커스타일은 안 좋은 소리만 하고,
(에나멜에서 조금 그에 대한 보상을 받았기 때문일까)
그럼에도 다음 작품인 수몰피아노와, 카가미 자매의 나는 교실이 기다려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